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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에 대하여 5] 신라의 계율
글쓴이 : 총무원 날짜 : 2016-03-04 (금) 17:22 조회 : 194


신라불교의 계율이 정립된 것은 자장율사()가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설치하고 난 뒤이다. 그러나 신라에서도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계율이 함께 유입되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551년(진흥왕 12) 고구려에서 귀화한 혜량()이 팔관회()를 베푼 것은 팔관재계에 근거한 것이며, 원광()의 세속오계는 계율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이 가미된 것이다.


원광은 화랑도였던 귀산() 등의 젊은이가 일생 지켜야 할 종신지계()를 청하였을 때, 불교에는 보살십계가 있으나 세속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세속을 위한 오계를 따로 지어 주었다.


즉, 임금은 충성으로 섬겨야 하고, 어버이는 효도로써 섬겨야 하며, 벗은 신의로써 사귀고, 싸움터에 나가면 물러서지 말아야 하며, 목숨이 있는 것을 가려서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살생유택에 대해서는 불교에서 불살생의 시기로 정한 육재일()과 봄·여름에는 산 것을 죽이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이때는 말·소·닭·개 등에서부터 아주 작은 생물까지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며, 쓰임에 따라 죽이더라도 많이 죽이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이다.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와 살생유택은 불교의 제일계인 불살생과는 크게 내용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열반경 ≫을 탐독했던 원광으로서는 “불법을 수호하는 사람은 칼과 활을 들고 비구를 수호해야 한다.”, “국왕과 대신, 그리고 신자들이 불법을 지키기 위해서 칼과 창을 갖는 것은 결코 파계가 아니다.”라고 한 ≪열반경≫의 정신을 계승하여, 삼국의 대치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지킬 수 있는 생활의 규범을 제시하였다.


한편, 신라 왕실과 민중들 사이에는 고구려의 사문 혜량이 귀순한 뒤부터 삼국통일 전까지 팔관지법()이 크게 유행한 듯하다. 팔관지법이란 팔관회에 앞서 실시된 불교의식으로 추정된다.


원래의 팔관은 아함경전()에 나오는 초기 계율로서의 8계를 뜻하며, 8계는 모두 발달된 계율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 계율을 온전히 지키는 것이 해탈()·성도()의 열쇠가 되는 것이며, 열반성()에 도달하는 관문인 까닭이다.


인도에서는 매월 7일과 15일의 월 2회에 걸쳐 설계() 또는 포살()이라고 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는 8계의 준수 여부를 반성하고 설법을 들으며 다시는 계를 범하지 않기를 맹세하는 의식으로 진행되었다. 중국 양나라의 무제()는 이 포살을 하나의 국가적 행사로 중요시하고 팔관재회라고 하였다.


신라의 팔관회도 처음에는 근본 계율을 준수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팔관지계와 같은 뜻으로 시작되었다가, 점차 토속신앙과 결부되어 나중에는 전사자를 위한 위령제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으며, 결국 하나의 민족 축제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원광의 세속오계도 이 팔관지계와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상은 일반 세속인과 관련된 신라 계율의 일면이며, 불교 승단()의 계율에 관한 내용은 자장 이전의 시기에는 찾아볼 수가 없다. 643년(선덕왕 12)에 귀국하여 대국통()이 된 자장은 확립되지 못한 불교 교단 자체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매달 보름과 그믐에 승려들이 함께 모여서 지난 보름 동안의 생활을 반성하고 죄가 있을 때는 여러 대중 앞에서 고백하여 참회하게 하는 포살의식을 철저히 실천하였다.


또, 모든 승려에게 불경을 공부하게 하여 봄과 가을에 시험을 보았다. 그 밖에도 사람을 전국으로 보내어 지방의 여러 절들을 살펴 승려들의 생활이 계율에 어긋남이 없도록 감찰하였으며, 불경과 불상을 모시는 것도 율을 따라 봉안하게 하여 승단의 기풍을 세우는 데 진력하였다. 당시 불교를 믿는 사람들 중 열의 아홉은 자장으로부터 계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당나라 계율종의 시조 도선율사()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자장은 수계의식을 집전하는 장소인 계단을 만들었다. 그는 중국에 있는 동안 도선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신라에 계단을 만들어 불교 교단의 기풍을 법에 맞게 엄격히 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래서 자장율사는 646년(선덕왕 15) 경상도 양산에 통도사를 세우고 당나라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받아 온 불사리를 봉안하여 금강계단을 만들었다.


이것이 신라 최초의 계단이다. 이때부터 통도사에는 이미 출가한 사람이나 재가자 할 것 없이 자장에게 계를 받으려고 금강계단을 찾아드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에 자장은 계율종을 열고 계율을 중심으로 하여 승려나 재가자들이 모두 바른 윤리를 정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사분율≫과 ≪십송률 ≫의 주석서인 ≪사분율갈마기 ≫와 ≪십송률목차기 ≫를 저술하였는데, 우리 나라 승단에서 소승의 ≪사분율≫을 기초로 하여 대승의 ≪범망경 ≫을 신봉하게 된 연원은 자장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계단의 설립은 중국 도선의 남산종()과도 맥을 같이한다. 도선은 자장이 세상을 떠난 지 10여 년 뒤인 667년 장안 시외의 정업사()에 계단을 만들고, 또 ≪관중창립계단도경 ≫을 지어 계단의 기원과 명칭, 모양 등을 자상하게 적어 놓음으로써 당나라의 계율종을 획기적으로 진전시켰다.


우리 나라에서도 고려에 접어들면서부터 금산사()·불일사()·영통사()·복흥사()·용흥사() 등에 계단을 만들었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통도사·금산사·불일사지 등이다.


자장율사와 같은 시대의 승려 원승()도 정관() 초년에 당나라로 가서 구법하고 자장과 함께 귀국하여 율부를 개강, 크게 교화하였다. 그는 ≪범망경기 ≫ 1권과 ≪사분율갈마기≫ 2권, ≪사분율목차기≫ 1권 등을 저술하였으나 현존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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