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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에 대하여 4] 백제의 계율
글쓴이 : 총무원 날짜 : 2016-03-03 (목) 16:09 조회 : 172


백제에 계율이 전래된 것은 마라난타()가 384년 불교를 전파할 때의 일로 추정된다. 그러나 백제의 율학이 본격화된 것은 겸익()에 의해서이다.


겸익은 526년(성왕 4) 인도에서 돌아와 율종()을 세웠다. 그는 중앙인도의 상가나사()에서 범어를 배우고, 율부()를 전공한 뒤,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과 함께 귀국할 때 범문으로 된 율문을 가지고 귀국하여 72권으로 번역, 편찬하였다.


흥륜사()에서 그가 범본을 번역할 때 국내의 고승들이 그를 도와 윤문 및 증의()를 하였으리라고 추정된다. 그 뒤 담욱()과 혜인()은 이 율에 대한 소() 36권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이 율문을 기록에는 ≪범본아비담장오부율문 ≫ 또는 ≪비담신율 ≫이라고 하고 있다.


왕은 이 ≪신역율본≫을 태요전(耀殿)에 보관하고 장차 널리 보급시키려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인도로부터 직접 원전을 가져와 백제 사람의 손으로 번역을 했다는 것은 매우 의의 있는 일이다.


중국 및 우리 나라에서 널리 채택되었던 ≪오분율 ≫은 424년경에 중국 양도()에서 번역되었고, 408년경 ≪마하승기율 ≫과 ≪사분율≫은 장안()에서, ≪십송률 ≫ 역시 404년경 장안에서 번역되었다. ≪살바다비니 ≫는 350년에서 431년 사이 번역된 역자 미상의 율전이다.


겸익이 가져온 것이 이 다섯 가지 율전의 다른 이름이었다면, 중국에서 번역된 것을 들여와 쓰지 않고 왜 이와 같이 큰 수고를 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겸익의 이와 같은 노력에 의해서 백제불교는 율종을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백제의 계율사상은 한편으로 일본에서 꽃피게 되었다. 554년(성왕 1) 16명의 승려를 최초로 일본에 보냈고, 577년(위덕왕 24) 불경과 함께 율사 등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588년(위덕왕 35) 일본 최초의 비구니 선신() 등 여러 명이 백제로 건너와서 3년 동안 계율을 배우고 돌아가서 일본 계학의 후원자가 되었다.


또한, 백제의 승려들은 일본인들에게 직접 계를 주고 승려로 만들기도 하였다. 구족계를 받지 않고는 승려가 될 수 없다는 불교의 계율에 따라 백제 승려들이 수계함으로써 일본의 승려들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계율 신봉적인 경향은 점차 백제불교를 극단적으로 형식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599년(법왕 1) 전국에 영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어획과 수렵 등에 사용되는 도구들을 모두 없애게 하였으며, 심지어는 민가에서 기르는 조류까지도 놓아 주게 하였다.


왕은 불살생의 도를 전국민에게 요구했지만, 짐승을 죽이지 않는 것보다는 백성을 괴롭히지 않는 정치를 하는 것이 보다 불도의 참뜻을 살리는 것이라고 본 신라의 자유로운 계율관과는 대조적인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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