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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조계종 총무원장 혜인스님의 "서유기의 삼장법사 현장스님 이야기 2"
글쓴이 : 총무원 날짜 : 2016-12-29 (목) 17:50 조회 : 657


(1에 이어서...)


현장은 이곳에 머물며 경전을 강의했고, 떠날 때가 되자 왕은 그에게 많은 마필(馬匹)과 법의(法衣)와 여비를 주고, 전국의 대신과 고승들과 함께 십여 리를 쫓아오며 눈물로 배웅했다.


일여 년의 시간을 서역에서 보내고, 630년 겨울에야 비로소 현장은 인도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는 먼저 여러 곳의 성지를 참배하고 마지막으로 석가가 수도하던 곳에 이르렀다. 그는 높이가 다섯 장(丈)이 조금 넘는 보리수 아래에 섰다. 천 년 전에 성인이 중생을 위해 홀로 적막한 황혼을 무수히 보냈음을 생각하니, 넘치는 감개를 억누를 길 없어 목 놓아 울어버렸다.


현장은 ‘앞서 간 사람들을 볼 수 없고, 뒤따라 올 사람을 만날 수 없음’에 슬퍼하고, 또 불법이 점점 쇠퇴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통곡했다. 현장은 이 성스러운 곳에 아흐레 동안 머물다가 열흘째 되는 날, 비로소 목적지인 나란타(那爛陀) 사원으로 향했다.


현장은 이곳에서 계현(戒賢, 시라바드라)법사에게 유가론(瑜伽論)을 배웠다. 당시 계현법사는 백여섯 살의 고령으로, 심한 풍토병을 앓고 있었다.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몇 번이나 자살로 해탈을 구하려 했다. 그러나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불법을 구하러 찾아온 현장에게 감동되어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때부터 자신의 고통을 잊고 현장을 위해 불경을 해설하기 시작하여 5년이나 넘겼다.


현장은 나란타 사원에서 최고급의 대우를 받았다. 조용한 방에 머물면서 당시 고승 · 귀족 · 국왕만이 먹을 수 있는 특산 쌀을 받았으며, 외출할 때는 코끼리 가마를 탔다. 나란타 사원에 머무는 5년 동안 현장은 불교에 대해 깊고 넓은 기초를 닦았다. 그 후 인도의 모든 지역을 돌아다니며 명승(名勝)을 찾았다. 그리고 5년 후에 다시 나란타 사원으로 돌아와 불학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인도 전역에 알려졌고, 이름난 승려들이 앞 다투어 찾아와 그와 변론을 벌였다. 그러나 모두 그의 언변과 학문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가 현장은 갑자기 중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뜻밖에 엉뚱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당시 인도에는 많은 나라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계일왕(戒日王, 하르샤바르다나)의 세력이 가장 컸다. 일찍이 그는 현장을 초청했고, 그래서 현장은 돌아가는 길에 그곳에 들르기로 했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 구마라 왕도 사자를 보내 현장을 초청했다. 계현법사는 “현장에게 선약(先約)이 있다.”라는 이유로 구마라 왕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이에 화가 난 구마라 왕이 최후통첩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법사를 만약 오지 못하게 한다면, 나란타 사원을 쳐서 평지로 만들어버리겠다.”라는 것이었다.


계현법사가 현장과 의논한 끝에 결국 구마라 왕에게 먼저 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 소식을 접한 계일왕이 크게 화를 내며 사자를 구마라로 보내 현장을 데려오도록 했다. 구마라 왕은 이에 회답을 보냈다.


“내 목을 자를 수는 있을지언정, 현장은 절대 돌려보내지 못하겠소.”

이 편지를 본 계일왕은 분을 못 참고 다시 사자를 보냈다.

“왕의 머리를 내게 준다고 했기에, 지금 사자를 보내오. 이 사람 편에 왕의 머리를 보내주기 바라오.”


하는 수 없이 구마라 왕은 이만 명의 코끼리 부대와 삼만 척의 배를 이끌고 갠지스 강기슭에 임시로 행영(行營)을 지었다. 그리고 친히 계일왕에게 나아가 백배 사죄를 했다. 계일왕은 만조의 대신들을 거느린 채, 양편에 횃불을 늘여 세웠다. 그러고는 한 걸음마다 쇠북을 울리며 기세도 당당하게 현장을 맞이했다. 현장이 가까이 오자, 계일왕은 즉시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