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 불교계는 호국불교라는 기치 아래 의승군 활동을 벌였다. 이 양난 이후 불교계는 안팎으로 크게 다른 움직임을 보인다. 이를 두고 사회활동에 따른 유학자들과 국가의 인식이 변화했다는 주장과 여전히 억불정책은 계속됐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바뀌 었다는 측의 주장
조선왕조실록 기록 및 승려 비문과 문집을 살펴보고 양란 이후 국가차원에서 불교에 대한 효용성 인식이 이뤄졌다고 밝혔다. “양란 이후 총섭제도를 통해 승단은 국가 통제권이 들어가게 됐다. 총섭제도는 군사조직으로서 종교적 의미에서 본다면 비상식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승려들이 국가적인 질서 안으로 편입된 점은 확연히 다른 모습”이라고 말했다.
스님들은 "18세기 이후부터는 승려들은 호적에도 등재돼 백성의 지위를 제도적으로 보장받게 된다”며 “이로 인해 사원경제가 조금씩 회복되고 현존하는 많은 사찰 건축물들이 이때 조성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역으로 불교계의 정치활동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조선 전기에는 많은 승려들이 중앙 정치무대로 찾아가 고려시대처럼 불교를 제도적으로 보장받고자 하는 노력들이 있었지만 양란 이후 불교계는 중앙진출보다는 지방 산중에 거처하며 후학들을 양성하고 불사를 이어갔다”고 말했다.
"이는 수행자의 본분을 지키고 불사를 통해 불교를 발전시키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바뀌지 않았다는 측의 주장
“억불정책을 지속하고 하지 않고 한 것은 군주의 성향과 시대 상황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므로 ‘억불정책은 지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라고 지적했다.
“승려를 군인으로 동원키 위해 국가로부터 그럴 듯한 직함도 받고 대우도 받았으나 전란이 끝나자 곧 성 쌓는 데 동원됐다. ‘총섭’이라는 허명의 직책을 제수하며 불교를 악용하였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특히 산성 축조와 경비에 승려들이 동원된 점을 억불정책의 예로 들었다. “전란 이후 산성축조에 전국사찰에서 1년 6회 700명이 차출됐다. 그 제반경비 조차 사찰과 개인이 부담해야 했다”며 “이것을 충당하기 위해 출신 속가의 재산까지 팔아야 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또 이 부역을 피하기 위해 다른 승려를 고용하는 번전제도가 생기고 이 제도가 갑오경장까지 이어진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