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유사》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스님으로 원효스님입니다.
원효스님이 출가하기 전의 성은 설씨입니다. 할아버지는 잉피공이고, 아버지는 담날내말입니다. 원효스님은 압량군 남쪽, 불지촌 북쪽 율곡의 사라수 밑에서 태어났습니다. 마을 이름은 발지촌이라고 합니다. 원효스님은 출가한 뒤 자신의 집을 바쳐 절로 삼고, 초개사(初開寺)라고 했고, 사라수 곁에도 절을 세워 사라사(裟羅寺)라고 하였습니다.
원효스님의 어릴 적 이름은 서당인데 집에서는 신당이라고 불렀다 합니다. 원효스님의 어머니는 유성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원효스님을 가졌다고 합니다. 또한 원효스님을 낳을 때 오색구름이 땅을 덮는 신기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태몽대로 산다고 하는데, 유성이 들어왔다고 하니,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해동선맥의 깨달음의 꽃씨를 뿌렸으니 원효스님은 한국불교의 유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이가 들어서 원효스님은 거리를 다니며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는데, 노랫말은 아래와 같습니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게나. /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
사람들은 이 노래가 무슨 뜻인 줄 몰랐으나, 오직 왕만이 가사의 뜻을 제대로 알았습니다.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원하는구나.”
왕은 요석공주를 원효스님의 짝으로 점찍었고, 관리에게 원효스님을 요석궁에 데려가라고 일렀습니다.
원효스님의 노래에 대한 해석은 분분합니다.
자루 없는 도끼와 기둥이라는 점에서 성적인 메타포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고, ‘없다’와 ‘하늘’이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어 공사상을 설파한 것이라고 보는 이도 있습니다.
최근 소설가 한승원 씨는 자신의 장편소설 《원효》를 통해 당시 원효는 반전(反戰)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왕의 명을 받은 관리는 원효스님을 찾아다니다 남산 아래에서 문천교를 지나는 원효스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일부러 원효스님를 밀어 다리 아래 물에 떨어뜨리고는 흠뻑 젖은 옷을 말리자는 구실을 대며 원효스님을 요석궁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렇게 원효스님은 요석궁에 머물게 됐고, 오래지 않아 요석공주는 설총을 낳았습니다.
원효스님은 파계해 설총을 낳은 뒤 승복을 벗고 세속 사람들과 같은 옷차림을 하고 다니며 스스로를 소성거사라고 했습니다.
원효스님은 어느날 길을 가다가 우연히 광대들이 갖고 노는 큰 박을 보고 그 모양을 본 떠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화엄경》의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문구를 인용해 그 도구를 ‘무애(無碍)’라고 지었습니다. 원효스님은 무애가를 지어 마을을 돌며 사람들을 교화했습니다. 하여 무지몽매한 백성들도 부처의 이름을 알게 됐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원효스님을 새벽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이 땅의 불교의 새벽을 여신 원효스님에게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 지 가슴 깊이 고민해봐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