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단경』에 보면
내 마음은 거울과 같으니 때때로 닦아 먼지가
끼지 않도록 하라 했습니다.
즉 그냥 두면 녹이 쓰니 열심히 닦으라는 뜻입니다.
시커멓게 녹슨 구리거울 속에 얼굴을 비출 수 있는
요소가 갖추어져 있으니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에
나를 경책할 줄 알고 나를 길들여서 자신이
길들여진 사람을 성불한 사람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불교를 믿는 사람들도
보살님은 절에 다니는 목표가 뭡니까하고
물어보면
목표가 뭐가 있어요, 그저 열심히 빌어 부처님
복 받으려는 것이지하는 정도지
나는 불교인으로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개념이 없어요.
불교의 목표는 자타일시성불도입니다.
축원할 때 꼭 자타일시 성불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어쩌다 빠졌어요.
전해 오는 말에
인불언(人不言)이면 귀불지(鬼不知)라,
사람이 말하지 않으면 귀신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옛날 어떤 사람이 젊어서 결혼을 했는데부인이
첫 아이를 낳다 그만 산고로 죽어버렸습니다.
옛날엔 첫 아이를 낳다 죽으면 귀신이 되서
남편을 잡아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래 이 남자가 고민이 되서 잠을 못잘
지경이었습니다.
어쩌다 잠이 들어도 귀신이 된 부인이 나타나서는
피를 뿌리며 괴롭혀 잠을 못 잤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살 수가 없어 이 사람이
죽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는 산으로 올라갔는데
그곳에서 도력이 높아 보이는 노스님을 만났습니다.
젊은이가 보기에 그 노스님이라면 자기가 죽지 않고
살 방법을 알려 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노스님이 말하기를 살고 싶으면
내 말을 꼭 믿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젊은이가 그러겠다고 다짐을 하니,
노장은 나무해 와라, 불 때라, 청소해라,
밥하라며 온갖 일을 시켰습니다.
젊은이는 속으로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몸이 고단해 잠도 조금씩 잘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도 귀신이 아주 안 보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지내다 보니 노스님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믿고 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스님이 젊은이에게 붉은 팥을
다섯 개를 주며
귀신에게 이것이 뭔지 아냐 물어
모른다하면 귀신에게 확 뿌려라,
하지만 안다면 다시 몇 개냐고 물어본 후
모른다고 할 때귀신에게 이 팥을 던지면
귀신이 사라 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철썩 같이 믿고 그날 밤 잠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귀신이 나타났습니다.
그래 귀신에게 이게 뭐냐 물었더니 팥이라고
딱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몇 개냐고 물었더니 다섯 개라고
척척 맞추는 것입니다.
결국 그날 밤 귀신을 쫓는데 실패했습니다.
그 다음 날에 팥알 몇 개를 더 갖고 잤는데
귀신이 또 척척 맞춰 실패했습니다.
그랬더니 노스님이 그 귀신이 개수를 척척 맞추니
이번엔 아예 세보지도 말고 그냥 한 움큼 집어 갖고
있어봐라 했습니다.
그날 밤 역시나 그 귀신이 또 나타났는데
몇 개냐고 물어봤더니 이번엔 귀신이 모르겠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 팥을 귀신에게 확 던지니 마침내 그 형상이
사라지고 젊은이는 오랜 만에 편한 잠을 실컷
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왜 몇 개인지 몰랐을까요.
노스님 말씀하시길
사람이 다 만든 것이지,
죽은 귀신이 뭘 알겠느냐.
사람이 아니 귀신도 아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 숨이 멈추었더라도
듣는 기능이 끝까지 남아 있기 때문에 죽은
사람에게지극한 마음으로 염불을 해주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염불을 지극한 마음으로 해주어야지
염불 소리와 염불하는 사람의 마음이 다르면
중음신은 마음의 소리를 듣습니다.
염불을 하면서도 부모님은 왜 재산을 나 안주셨나,
동생이랑 나눠가져라 하시니 속이 상한다는 둥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부모님 영가가 그 말씀을
듣고는 극락 갈래야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부모님 영가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뭘까요.
저 철없는 자식이 철드는 것을 봐야 마음 편히
갈 길을 가겠는데 어린아이를 우물가에
내놓은 것 같으니 극락이 아무리 좋다 해도
마음이 놓이질 않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칠월 백중에 부모님 천도하려는 마음만큼만
평소에 부모님 생각을 하면서 순간순간을 살고,
내가 지금 사는 모습을 부모가 보신다면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가를 생각하면
아무렇게나 행동하며 살 수 없겠지요.
그러면 천도가 다 된 것입니다.
절에 가 법문을 듣는 것도 내가 그 생각을
똑바로 알고 있는가,
그 훈련이 잘 돼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불법을 배운다는 것은 문(聞), 사(思), 수(修)
삼단계입니다.
듣고 생각하고 닦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듣기만 하려고 합니다.
법문을 듣고 내가 할 역할이 무엇인지는
생각을 안 해요.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들으신 법문에서
무엇을 강조하셨는지 마음에 남는 것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게 헛장사한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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