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은 치수관장의 영물이요
토룡은 분열의 상징입니다
《삼국사기》 본전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견훤은 상주 가은현 사람으로 함통 8년 정해(868)에 태어났다. 본래 성은 이씨였으나 후에 견을 성씨로 삼았다. 아버지 아자개는 농사를 지어 생활을 하다가 광계 연간(885-887)에 사불성에 웅거해 스스로 장군이라 칭했다. 아들은 넷으로 모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는데, 견훤은 지혜와 책략이 많아서 출중하게 뛰어났다.’
《고기》에는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옛날에 광주 북촌에 사는 한 부자가 딸 하나를 두었는데, 태도와 용모가 단정했다. 딸이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자주빛 옷을 입은 남자가 밤마다 저의 침실에 와서 관계를 합니다’ 하니, 아버지가 이르길 ‘너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남자의 옷에 꽂아 두어라’라고 했다. 딸이 그 말을 따랐다. 날이 밝자 실은 북쪽 담장 아래에서 찾았는데 바늘은 큰 지렁이 허리에 꽂혀 있었다. 이로 인해 그 후 임신하게 돼 사내아이를 낳았다. 아이 나이 15세가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 경복 원년 임자(892)에 이르러 왕이라 칭하고 완산군에 도읍을 세워 43년간 다스렸다. 청태 2년 을미(935)에 견훤의 세 아들이 반역함에 따라 견훤은 태조에게 투항하고 그의 아들 신검이 왕위에 올랐다. 천복 원년 병신(936)에 고려군사와 일선군에서 싸워 후백제가 패하니 나라가 망했다고 한다.”
견훤이 지렁이의 자손이라는 내용은 견훤이 토룡(土龍)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부터 동북아에서는 용(龍)을 신권과 동일시했습니다. 용의 우리말은 ‘미르’로 그 어원은 ‘물’이라고 합니다. 농경사회에서 물은 곧 경제력인 동시에 생명력인 것입니다. 정치(政治)라는 말뜻이 실은 ‘바른 치수’라는 것만 봐도 우리의 선친들이 얼마나 물을 소중히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견훤은 여의주를 물고 하늘로 승천하는 용이 아니라 토룡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견훤이 지렁이의 혈족이라는 것은 삼국을 통일하지 못할 비운을 타고났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한, 지렁이는 몸체가 나눠져도 각각의 몸체가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가계의 분열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견훤의 가족은 나중 아버지 아자개가 고려에 귀순하고, 아들들도 서로 반목해 견훤을 배반해 뿔뿔이 흩어지고 맙니다.
일설에는 훈요10조의 제8조인 ‘차현 이남 금강 이외의 산형지세는 배역하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이 예법에 벗어난 견훤 가계사를 보고서 제정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쨌든 견훤설화를 읽노라면, 백제 유민(流民)의 설움이 느껴집니다. 패망한 국가의 백성들이 국가 재건의 꿈을 실패했으니 그 애절한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런지 견훤설화를 읽노라면 충남 강경 출신의 박용래 시인이 떠오릅니다. 시인의 한자 이름은 용래(龍來). 말 그대로 용이 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평생 시를 썼을 뿐 어떤 관직에도 오르지 못했습니다. 박용래 시인도 용은 용이었으나 권세의 용이 아니라 이 땅의 애환을 슬퍼했던 토룡이었던 것입니다.
약간 다른 얘기지만 견훤설화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지역감정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과 지도자는 물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묵은 지역감정이 다시 되살아나는 시점에서 토룡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토룡은 각각의 몸체가 떨어져도 살아갑니다. 즉, 분열을 상징합니다. 지역분열을 유도하는 후보자가 있다면 그는 용이 아니라 토룡일 것입니다. 또한, 용은 치수관장의 영물인 만큼 치수에 대해 얼마나 명확한 공약을 갖고 있는지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치수란 물론 경제정책과 환경정책을 두루 관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