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 웃음은 풀잎의 이슬이요,
향긋한 약속 바람에 흩어지네

인생무상 일깨워주는 조신의 꿈

조신스님은 명주 날리군에 위치한 절의 장원을 맡고 있었습니다. 조신은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김흔 공의 딸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조신은 날마다 낙산사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그녀와 함께 살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빌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상심한 조신이 하루는 법당에서 설핏 잠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낭자가 사뿐히 걸어왔습니다.
“저는 스님을 잠깐 뵌 뒤로 스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지시 때문에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어요. 이제 스님과 부부가 되고 싶어 이렇게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조신은 바로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두 사람은 40여 년을 함께 하며 자녀도 다섯이나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생활은 점점 어려워져 집은 겨우 한 칸 뿐이고, 끼니를 이을 음식마저도 구하기가 어려운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부부는 다섯 아이를 데리고 사방으로 다니며 겨우 구걸을 해서 먹고 지냈습니다. 그러기를 어느덧 10년, 거지가 다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열다섯 살 난 큰아이가 굶주림에 지쳐 쓰러지더니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부부는 서럽게 통곡하면서 아이를 길가에 묻었습니다.
부부는 남은 네 아이를 데리고 우곡현이란 곳에 가서 띳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이제 부부는 늙고 병들어 운신을 할 수 없었습니다. 겨우 열 살 된 딸아이가 밥을 빌러 다녔는데, 하루는 이 딸마저 마을로 구걸을 갔다가 그만 사나운 개에게 물리고 말았습니다.
조신의 아내가 몹시 슬피 울더니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은 얼굴도 잘 생겼고, 젊었으며, 옷도 깨끗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몸은 쇠약해지고 병세는 점점 약화되어 남의 집 곁방살이에, 빌어먹을 수도 없는 한심한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예쁜 얼굴, 환한 웃음도 다 풀잎의 이슬이요, 향기로운 난초 같은 약속도 바람에 나부끼는 버들가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만히 옛날의 기쁜 일들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시작이었음을 알겠습니다. 그대와 내가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이제 그만 우리 헤어지기로 합시다.“
조신은 아내의 말에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두 사람은 각각 아이 둘씩을 데리고 떠나기로 하였습니다. 아내와 작별하고 막 길을 나서는 순간, 조신은 꿈에서 깨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니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하얗게 세어 있었습니다. 조신은 정신을 놓고 있다가 불현듯 꿈속에서 아이를 묻은 생각이 나 그곳에 가 땅을 파 보니 놀랍게도 돌미륵이 나왔습니다. 조신은 미륵불을 모셔 정토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불도를 닦다가 열반에 들었습니다.
조신설화를 읽으면 ‘일장춘몽(一場春夢)’이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또한, 장자의 ‘호접몽(胡蝶夢)’ 일화도 생각납니다. 성주괴공의 이치는 사계의 자연이나 생노병사의 삶에도 그래도 적용됩니다. 아름다운 것들은 언젠가 추해지고, 끝내 땅에 떨어져 거름이 되고 맙니다.
신상옥 감독의 ‘꿈’도, 배창호 감독의 ‘꿈’도 모두 조신설화를 원형으로 만들어진 영화들입니다.
영화나 사진은 영상예술이어서 찰나의 미학이 제일 부각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빛이라는 건 미처 손 쓸 새도 없이 사라지나니. 사진도, 영화도 한낱 꿈 속의 한 장면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
그렇다면 우리는 이 허망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십시오. 그러면, 조신이 땅속에서 미륵불을 발견한 것처럼 부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불법(佛法)을 귀감 삼아 자비행을 펼치고 살다보면, 찰나와 같은 삶도 영원의 길로 나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