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조계종 ▒ -혜인스님, 중국남경중의학대학,불교대학림

불교조계종

자료실
Home >자료실 > 경전 공부실 경전 공부실
총 게시물 781건, 최근 0 건
   
오쇼 라즈니시의 금강경(8)
글쓴이 : 총무원 날짜 : 2015-06-16 (화) 14:15 조회 : 1005
오쇼 라즈니시의 금강경

제2부 진리의 수레바퀴의 내용

제4장 묘행무주분
제5장 여리실견분
제6장 정신희유분


금강경 제4장
묘행무주분-묘행은 머무는 곳이 없다.

<제4장 원문>


고타마 붓다는 말한다.

그러므로,수부티여,주의깊게 잘 들어라.

... 이상한 말이다. 지금 붓다는 보디사트바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말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었다면 그리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주의깊게 잘 들을 필요가 있다는 것은 이해할만 하다. 잘 듣는 것은 매우 어렵다. 잘 듣는 것은 지금여기에 존재함을 뜻한다. 잘 듣는 것은 아무 사념도 없이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민감하게 깨어있는 의식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런 조건이 다 충족되었을 때,비로소 그대는 잘 들을 수 있다.

... 마음은 안에서 미치광이처럼 날뛴다. 사납게 이리 저리 날뛴다. 마음은 끊임없이 수 많은 사념의 실을 자아낸다. 과거와 미래로 좌충우돌하며 온 세상을 헤집고 다닌다. 그러니 그대가 어떻게 잘 들을 수 있겠는가? 그대가 무엇을 듣건 그것은 올바르게 듣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대는 말해진 적도 없는 엉뚱한 것을 들을 것이며,말해진 것은 모두 놓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는 말하는 자와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귀머거리는 아니니까 듣기는 들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참으로 듣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이렇게 말한다.
"귀있는 자는 들어라. 눈있는 자는 보아라."
예수의 제자들은 귀머거리도 아니고 소경도 아니었다. 그대처럼 아무 이상없는 눈과 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말은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의 말은 그 상황에 맞는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을 상대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들의 주의를 끌어야 하고 큰 소리로 주장하듯이 외쳐야 한다. 그런데 붓다의 말은 참으로 이상하다. 그는 보디사트바를 상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거의 붓다가 될 문턱에 와 있는 사람에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주의를 기울여 잘 들으라고?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원문>

그러므로,수부티여,주의를 기울여 잘 들어라.

...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인가? 잘 듣는다는 것은 수용적인 자세로,깊은 수용성 안에서 듣는 것을 의미한다. 그대가 들으면서도 마음 속으로 자기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면,요모조모 자로 재듯이 판단하고 있다면,그대가 "그렇다,이것은 내 생각과 일치하므로 옳다. 그러나 저것은 내가 보기에 논리적이지 않으므로 틀리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믿을 수 있는데 저것은 믿을 수 없다....."-이런 식으로 말하고 있다면.....
그렇게 마음 속으로 모든 것을 분류하고 있다면 그대가 듣고있다 해도 그것은 잘 듣는 게 아니다.

... 그대는 과거의 마음을 갖고 듣는다. 과거의 마음이 끼어들어 시시콜콜이 참견을 일삼는다. 이렇게 판단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대가 판단하는 게 아니다. 그대의 과거가 끼어들어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대는 책에서 읽은 것도 있고,여기 저기서 들은 것도 있다. 그래서 그대는 세뇌되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끼어들어 참견하는 것은 그대의 과거이다. 과거는 계속 살아남기를 원한다. 과거는 자기를 파괴할 수도 있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이라면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거는 오직 자기에게 맞는 것만을 받아들인다. 그대가 판단하고,비판하고,마음 속으로 토론과 논쟁을 펼칠 때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 올바르게 듣는다는 것은 복종하는 자세로 듣는 것을 의미한다. 이 '복종(obedience)'이라는 말은 참으로 아름다운 말이다. 이 '복종(obedience)'이라는 말이 'obedire'라는 어원에서 나왔다는 것을 안다면 그대는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obedire'는 '철저하게 듣는다.'는 뜻이다. 왜 복종이 철저하게 듣는 것을 의미하는가? 복종과 철저하게 듣는 것이 똑같은 뜻이란 말인가? 그렇다, 그것은 같은 뜻이다. 만일 전체적으로 듣는다면,철저하게 듣는다면 그대는 복종할 것이다. 만일 거기에 진리가 담겨 있다면 그대는 복종할 것이다. 그대 쪽에서 결정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진리는 그 자체가 증거이다. 일단 진리의 말을 듣고나면 그대는 자동적으로 그 말에 따를 것이다. 거기에 복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 '복종(obedience)'이라는 말이 철저하게 듣는다는 뜻의 'obedire'에서 나온 것이다.

... 이와 유사하게 유태교의 전통에는 '귀를 드러내 놓는다.'이라고 말한다. 진실로 그대 귀를 열어 놓았다면,마음 속에 일말의 간섭이나 훼방도 없다면,아무 곳으로도 미혹되지 않고 그 자리에 주의를 기울인다면,그때에 그대는 귀만 열어 놓은 것이 아니다. 그대는 가슴까지 열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가슴 속에 씨앗이 떨어지면 멀지 않아 싹이 트고 나무가 자라날 것이다. 멀지 않아 꽃이 피어날 것이다. 씨앗이 싹터 나무가 될 때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씨앗은 적당한 때가 오기를,봄이 오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씨앗은 언젠가 나무가 될 것이다. 진리의 말을 들었다면 그대는 복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그런 까닭에,마음은 그대가 진리의 말을 듣도록 가만 놔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단 진리의 말을 들으면 그 다음에는 달아날 방도가 없다는 것은 마음은 잘 알기 때문이다. 진리를 아는데 어떻게 달아날 수 있겠는가? 진리를 안다는 사실 자체가 그대 안에 어떤 계율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대는 그 계율에 따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그대가 자신을 강요하여 억지로 만들어낸 계율이 아니다. 그 계율이 스스로 그대를 찾아온다.
귀마개를 제거해야 한다.
무엇이 귀를 막는가?
진리에 대한 두려움이 그대의 귀를 막는 주원인이다.
그대는 진리를 두려워한다.
그대가 뭐라고 말하든 간에,그대가 "나는 진리를 알기 원합니다."하고 계속 말한다 할지라도 그대는 진리를 두려워한다. 그 이유는 그대가 거짓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대는 너무나 오랫동안 거짓 속에 살아왔다. 그래서 그 모든 거짓이 진리를 두려워하며 벌벌 떤다. 만일 진리가 들어오면 그 거짓들은 모두 그대를 떠나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대를 완전히 소유하고 있다. 어둠이 빛을 두려워하듯이 거짓은 진리를 두려워한다. 그대가 진리에 더 가까이 가는 순간 마음은 크게 동요할 것이다. 마음은 미친듯이 먼지바람을 일으켜 그대의 눈을 가릴 것이다. 그대 주변에 구름의 장막을 쳐서 진리의 말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이다.

... 귀마개를 제거해야 한다.
가장 큰 귀마개는 두려움이다.
그대는 두려움 때문에 문을 닫아 걸었다.
붓다는 두려움을 걷어내지 않는 한 진리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대의 종교들을 보라. 그대가 해온 짓을 보라. 그대의 소위 종교라고 불리는 것들은 모두 두려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두려움을 통해서는 진리에 이를 방도가 없다. 오직 두려움없는 자만이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

... 교회나 모스크(mosque),또 사원에서 엎드려 절할 때, 조각상이나 경전, 전통에 대해 엎드려 절할 때, 그대가 절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절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그대의 마음을 들여다 보라. 그러면 그대는 수 많은 두려움을 발견할 것이다. 두려움과 두려움, 온갖 두려움이 첩첩이 쌓여 있다. 두려움에서는 진실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그대가 소위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두려움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이 세상에서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 어려운 이유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오직 두려움이 사라졌을 때에만 솟아나기 때문이다. 믿음은 오직 두려움이 타버린 자리에 피어난다.

... 믿음은 신뢰를 뜻한다. 두려움에 가득 찬 사람이 어떻게 신뢰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는 항상 교활하게 머리를 굴려 생각한다. 그는 항상 자신을 보호하고 방어한다. 그러니 어떻게 그가 신뢰를 가질 수 있겠는가? 신뢰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대담해질 필요가 있다. 신뢰하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배짱이 필요하다. 과감하게 위험 속으로 뛰어 들어야 한다.

... 바로 얼마 전에 나는 '위기(危機)'라는 중국의 표의문자를 보고 흥미를 느꼈다. '危機'라는 한자(漢字) 에는 두 가지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그 하나의 의미는 '위험(危)'이고,다른 하나의 의미는 '기회(機)'이다. 그렇다. 위험한 상황이란 곧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마주 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절호의 기회를 원한다면 위험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이다. 위험하게 사는 법을 아는 사람들,오직 그런 사람들만이 종교적이다. 두려움이 가장 기본적인 귀마개이다. 다른 귀마개들도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판단,주장,과거에 대한 집착,그대 안에 새로운 세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모두가 두려움 때문이다.

... 한 가지 더 말해 보자. '얼토당토 않다.(absurd).'라는 말이 '복종'과 정반대되는 뜻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대는 깜짝 놀랄 것이다. '얼토당토 않다.'라는 말은 귀를 완전히 막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대가 어떤 것을 얼토당토 않다고 말한다면, 그대는 "나는 이 사람이 나에게 말하려는 것에 대해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얼토당토 않게 여기는 태도를 복종하는 태도로 바꿔 놓으라. 그러면 그대는 귀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완전히 열리게 될 것이다.

...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에게 "주의깊게 잘 들어라."고 말하는 것은 합당한 말이다. 그런데 붓다는 왜 보디사트바의 경지에 오른 수부티에게 이렇게 말하는가? 여기에는 무엇인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뜻이 담겨 있다. 단어 그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가 전달될 때에 만들어진다. 누구를 상대로 말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그대는 붓다가 말하는 단어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전은 보디사트바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전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 그렇다면, "주의깊게 잘 들어라."고 하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에는 몇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을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하나의 의미는 이렇다. 수부티같은 사람이 거기에 있을 때에는 귀마개에 관한 문제가 없다. 그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또한 붓다에 대해 열려있어야 한다는 문제도 없다. 그는 이미 완전히 열려 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더 이상 붓다와 논쟁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전적으로 붓다와 함께 있다. 붓다와 함께 굽이쳐 흐른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보디사트바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붓다의 경지에 거의 근접했을 때, 그때에 몇 가지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 의식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때마다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문제가 있다. 그런데 보디사트바에게는 이것이 문제이다. 그는 활짝 열려 있다.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육체로부터 뿌리뽑혔다. 그의 가슴,그의 존재가 열려있지만 그는 더 이상 육체에 뿌리를 갖고있지 못하다. 그는 육체에 대한 애착을 끊었다. 육체는 다만 그의 주위를 배회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육체 안에 살지 않는다. 그는 육체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상태에서 거의 벗어났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 누군가 그대에게 "잘 들어라."고 말할 때,그의 말뜻은 그대의 육체는 듣고 있지만 그대는 듣고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붓다가 수부티에게 말할 때에는 정반대의 뜻이다. 붓다는 "그대는 잘 듣고 있는데 그대의 육체가 듣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 그대가 듣고 있을 때,그대의 몸은 여기에 있는데 그대가 여기에 없다. 말이 귀에 가 닿기는 하지만,거기에서 의미없는 소리와 소음으로 변해 버린다. 그리고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가 버린다. 그 말들은 그대의 존재를 만나지 못한다. 그대의 존재가 그 말들과 접촉하지 못한다. 그러나 수부티같은 사람의 경우는 그 정반대이다. 그의 존재는 거기에 있는데 그의 육체가 거기에 없다. 그는 육체의 궤도를 벗어났다. 그는 육체를 쉽게 잊는 경향이 있다. 육체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순간도 있다. 그는 거기에 있지만 육체가 거기에 없을 것이다. 그는 육체를 초월한 경지에 도달했다.

... 그런데 듣는다는 것은 오직 몸과 영혼이 함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대의 경우에는 몸은 있는데 영혼이 부재(不在)중이다. 반면,수부티의 경우에는 영혼은 있는데 육체가 부재중이다. 이것이 붓다가 수부티에게 "수부티여, 잘 들어라."하고 말할 때 의미하는 바이다. 그대의 육체를 이 곳으로 가져와라. 네 몸을 작동시켜라. 육체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 뿌리를 내려라. 육체는 그대가 타고 다니는 도구이다. 육체는 매개체이다.

그리고 붓다는 "주의깊게 들어라."하고 말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수부티에게 주의가 결여되어 있단 말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보디사트바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보디사트바는 깊은 주의력을 얻은 사람,항상 주의깊게 깨어있는 사람,언제나 밝은 의식을 가진 사람,더 이상 로보트가 아닌 사람이다. 그런데 왜 붓다는 "주의를 기울여라. 주의깊게 들어라."하고 말하는 것일까? 여기엔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또 하나의 의미가 담겨 있다.

수부티같은 사람은 쉽게 내면으로 들어가는 경향이 있다. 만일 그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금새 자신의 존재 속으로 들어가 사라질 것이다. 그는 오직 노력할 때에만 외부에 머물 수 있다. 그대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이다. 그대는 굉장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가까스로 내면의 존재로 들어갈 수 있다. 단 한순간 정도 사념이 멈추고 그대는 내면의 빛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아주 오래고 힘겨운 노력이 있어야 한다. 명상,요가 등 여기 저기를 전전하고 나서야 아주 잠깐동안 그 아름다움과 은총을 맛본다. 하늘이 열리고 구름이 사라진다. 거기에 빛이 있고 삶이 있다. 황홀한 기쁨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드문 한 순간의 일이다.....다시 모든 경험이 사라진다. 그대는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내면의 경험을 얻는다.

그러나 수부티의 경우는 그 정반대가 진실이다. 그는 자신의 내면으로 간단하게 사라진다. 그는 내면의 기쁨에 완전히 빠져 있다. 그러므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그는 붓다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붓다의 침묵은 완벽하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붓다가 무엇인가 말로 표현하고 있다면 그것을 듣기 위해 그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는 내면의 포도주에 취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면에서 나와야 한다. 그리고 육체 안으로 들어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붓다는 "주의깊게 잘 들어라."하고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다. 이 말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내가 처음이다. 이천 오 백년 동안 아무도 이 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붓다가 평범한 사람에게 "주의깊게 잘 들어라."하고 말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이 말을 취급했다. 그러나 지금 붓다는 평범한 사람에게 말하고있지 않다.

이천 오백년 동안 아무도 제대로 주석을 달지 못했다. 사람들은 말의 의미를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의 의미는 항시 변화한다. 그 말이 누구 입에서 나왔느냐,누구를 상대로 말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말의 의미는 전후문맥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말 자체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말은 무의미하다. 말의 의미는 그 말이 사용되는 특수한 상황안에서 비로소 생겨난다.
지금 이 상황은 매우 드문 경우이다. 붓다는 이 말을 수도 없이 사용했다. 그는 날마다 사람들에게 "주의깊게 잘 들어라."하고 말했다. 그래서 금강경을 해석한 사람들은 이 말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지나쳤다. 나는 그 해석가들이 진실로 '아는 사람(the knower)'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언어는 알았을지 모르지만 이 이상한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지금 붓다는 평범한 사람에게 말하고 있지 않다. 붓다는 깨달음에 거의 근접한 사람,붓다가 되려는 문턱에 와있는 사람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러므로'라는 말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므로,수부티여,주의깊게 잘 들어라.

이 '그러므로'라는 말 또한 매우 비논리적이다. '그러므로'는 오직 결론적인 부분으로 사용될 때에만 논리적이라 할 수 있다. 이 '그러므로'라는 말은 삼단논법의 일부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 때에 '그러므로'는 완벽하게 옳다. 이 말은 삼단논법의 한 부분,결론부에 속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아무 논리도 없다. 아무 말도 선행된 바 없다. 아무 전제도 없었다. 그런데 붓다는 난데없이 결론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붓다의 방식이다. 반야심경에서도 그는 사리자(舍利子)에게 "그러므로,사리자여....."라고 말한다. 이제 그는 금강경에서 "그러므로,수부티여....."하고 말한다. 수부티는 '그러므로'라는 말이 필요할만한 어떤 말도 한 적이 없다. 붓다 역시 '그러므로'라는 말이 필요할만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수부티의 내면에는 '그러므로'라는 말이 필요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수부티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그 일과 연관이 있다. 비록 수부티가 그것을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해도.....
스승은 그대 안에 무엇이 현존하느냐에 따라 반응한다. 스승은 그대의 말 보다는 그대의 침묵에 응답한다. 스승은 그대의 질문보다는 그대가 추구하는 것에 더 관심을 보인다. 스승은 그대의 질문보다 그대의 욕구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다. 이 '그러므로'라는 말은 수부티의 내면 깊은 곳에 미묘한 욕구가 잠재해 있음을 암시한다. 어쩌면 수부티 자신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수부티가 그것을 알게될 때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스승은 끊임없이 제자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그 내적인 욕구에 응답해야 한다. 그 욕구가 겉으로 표현되었든 표현되지 않았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제자 혼자 떨어져있을 경우에는 그 욕구를 발견하는데 몇 달이 걸릴지도 모른다. 몇해,또는 몇 번의 생이 소모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승은 그대의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까지 들여다 본다. 내일 또는 모레 그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이 생과 다음 생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승은 알고 있다. 스승은 그대의 여행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 따라서 이 '그러므로'라는 말은 수부티의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어떤 욕구와 관련이 있다.